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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에서 첼시를 꿈꾼 죄

뭐라카노 2010. 3. 31. 12:43

  

후반 25분, 승패의 갈림길. 박지성 out, 베르바토프 in

1999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전광판 시계가 멈추는 순간까지도 바이에른 뮌헨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허나,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뮌헨은 추가시간에만 연달아 두 골을 내주며 맨유에게 1-2로 역전패했다.

 뮌헨의 가나 출신 수비수 쿠포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고, 거의 포기했던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은 맨유는

사상 최고의 피날레를 즐기며 만세를 불렀다.

31일 새벽(한국시간) 3시 45분. 2009/2010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이 열린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뮌헨과 맨유가 다시 만났다.

이번엔 모든 게 그 때와 정반대였다.

경기 시작 2분만에 루니의 선제골로 앞서간 맨유는 중반 이후 무너진 밸런스를 바로잡지 못했고,

결국 리베리와 올리치에게 뒤늦은 연속 골을 내주며 극적인 패배를 경험했다.

거의 포기했던 승리를 손에 넣은 뮌헨은 11년전 맨유가 그랬듯 극적인 피날레를 즐기며 환호작약했다.

경기 시작과 함께 터진 루니의 선제골은 맨유의 승리를 담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출전한 중앙 수비수 데미켈리스는 공이 날아드는 순간 미끄러 넘어졌다.

덕분에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은 루니는 편안히 한 골을 주웠다.

뮌헨에게는 참으로 끔찍한 참사였다.

맨유는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 원정 4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이 경기 전까지 챔스리그 원정 17경기 무패 행진을 달리는 강호.

전반이 마무리될 때까지 뮌헨은 맨유보다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지만 위협적인 공격 찬스는 몇 되지 않았다.

승부의 전환점은 후반 25분께 찾아왔다.

후반 시작과 함께 리베리를 중심으로 헤쳐 모인 뮌헨 선수들은 맨유 진영을 야금야금 밀고 들어오며 사기를 회복해 나갔다.

하지만, 맨유 퍼거슨 감독은 후반 25분에 박지성과 마이클 캐릭 대신 베르바토프와 발렌시아를 집어 넣으며 위기를 자초했다.

결과적으로 패착이 된 이 선택으로 맨유는 패배의 빌미를 자초했다.

4-5-1에 가까운 포맷으로 중원에서 상대를 잘 막아내던 맨유는 이 교체가 이뤄진 뒤

경기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완전히 넘겨준 채 뮌헨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신세가 됐다.

'지성-캐릭 교체 아웃'…퍼거슨 감독의 자충수

퍼거슨 감독의 선수 교체를 패착이라 단정하는 이유는 여럿이다.

첫째, 경기 내내 점유율이 4:6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오히려 미드필더의 수를 줄여버렸다.

5인의 미드필더가 수비수들과 협력해 상대 공격의 예봉을 차단하며 리드를 지켜왔지만 이 교체로 허리진의 수가 줄어들었다. 

게다가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준 수세 상황에서 수비 지원 능력이 미약한 베르바토프를 넣은 것도 아쉬웠다.

베르바토프의 투입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뮌헨이 계속 밀고 올라오는 와중에도 베르바토프는 상대 진영을 미음완보하며 수비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루니가 한 발 더 뛰며 자기 진영으로 내려와 수비 지원을 해야 했다.

베르바토프를 넣음으로써 허리에 배치된 선수의 수가 하나 줄어든 꼴이 된 것이다.

박지성의 자리를 반대쪽에서 이동해 온 나니가 맡는 과정에서 람의 오버래핑이 활발해진 것도 지적해야 할 대목이다.

이렇듯 중원이 '털리기' 시작하다보니 수비진의 집중력도 분산됐다.

네빌의 어이없는 핸드볼 파울이 프리킥으로 이어져 동점골을 실점하고 에브라의 방심이 올리치의 결승골로 연결됐다.


둘째, 무릎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루니를 풀타임 출전시켰다.

퍼거슨 감독은 지난 주말 볼턴 원정에 루니를 아예 데려가지 않았다. 부상이 악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니는 뮌헨 전에서 위력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후반 중반 이후 활동 범위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루니는 끝까지 경기를 뛰었고 종료 직전에는 발목까지 다쳐 팀원들의 부축을 받고서야 경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맨유는 앞으로 1주일 동안 첼시전과 챔스 8강 2차전을 연달아 치러야 한다.

루니가 1주일이라도 출전할 수 없게 된다면, 이 날의 최대 손실은 패배가 아닌 루니다.

셋째, 주말 볼턴 전에 아껴 둔 박지성과 마이클 캐릭을 도중에 빼고 노장 스콜스를 풀타임 출전시켰다. 

볼턴 전에서 박지성은 아예 출전하지 않았고, 캐릭은 후반에 교체 투입되어 10여분만 뛰었다.

반면, '서른 일곱'의 스콜스는 볼턴 전에 선발 출전해 73분을 뛰었다.

스콜스는 나이가 들면서 스피드가 줄어들어 수비수 종종 박자를 놓치는 바람에 카드를 받고 위기를 허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날도 후반 들어 스콜스의 활동 폭은 전반전에 비해 크게 좁아졌다.

박지성과 캐릭이 나간 뒤 맨유의 중원에서는 압박이 실종된 것은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후반 중반부터 뮌헨의 파상공세가 시작된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퍼거슨의 교만 vs 반 할의 집념

퍼거슨 감독이 결국 패착이 되고만 선수 교체를 단행한 이유는 주말 첼시 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뮌헨 원정을 1대0 승리로 마감하는 것은 맨유에게 매우 긍정적인 시나리오다.

경기를 이렇게 마칠 수만 있다면, 주말에 있을 첼시와의 리그 경기를 대비해도 좋다. 

박지성과 캐릭을 빼고 베르바토프에게 루니와 함께 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결정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요한 경기가 연달아 있다보니 뒷 경기에 너무 마음을 쓰다 정작 진행 중인 경기의 승리를 저당잡힌 셈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또 뮌헨을 '업수이' 여긴 대가이기도 하다.

'명장'이라는 칭호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퍼거슨이지만 그도 실수할 때는 있는 법.

뮌헨의 홈에서 한 골차로 앞선 상황에, 그것도 상대에게 점유율을 크게 내준 상황에 현재보다 미래를 염두에 둔 교체를 단행한 것은 큰 실수였다.

선수들에 대한 믿음이 커서였을 수도, 상대를 얕본 탓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건 축구에서 감독은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퍼거슨의 교만이 내준 기회를 놓지 않은 반 할 감독의 용병술 역시 그런 점에서 호평받아 마땅하다.

경기 막판, 공격수를 연달아 추가 투입하며 역전골을 노린 반 할 감독의 집념이야말로 리베리의 위용과 함께 뮌헨 승리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렇듯, 퍼거슨의 맨유는 뮌헨 앞에서 첼시를 꿈꾼 죄로 역전패의 쓴잔을 마셨다.

이제 맨유에게는 앞으로 1주일에 올 시즌의 모든 성과가 달려 있다.

4일 간격으로 첼시와 뮌헨을 홈에서 상대할 맨유, 그리고 퍼거슨 감독에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여력은 이제 없다.

만일 두 경기를 다 잡지 못한다면 올 시즌 맨유는 더 이상의 우승 트로피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