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야기

대한독립을위해 일해준 고마운 일본인

뭐라카노 2014. 5. 29. 07:53

대한독립을위해 일해준 고마운 일본인


츠지 마사노부

辻 政信 (つじ まさのぶ) 1902년 10월 11일 ~ 1961년 7월 20일




구 일본군 장성. 무다구치 렌야와 함께 인간 과부제조기 생긴것과 같이똘끼가 매우 충만한 첫손에 꼽히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다.


 

계파적으로 이시하라 칸지의 영향을 받아 만주국의 건국이념인 오족협화를 실제로 믿고 있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는 줄곧 '작전의 신'이라고 불렸는데, 이게 자칭 신이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1 경력 
2 근성론과 활약(?)상 


2.1 노몬한 전투(할힌골 전투) 
2.2 싱가포르 전투 
2.3 필리핀 
2.4 과달카날 전투 
2.5 패전 후 활약 
2.6 정계 진출 후의 활약

3 주변인들이 본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 


3.1 태평양 전쟁 당시의 평가 
3.2 '개인'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

4 종합적인 평가 목차






경력


당시의 최신식 학문기관이던 육군대학을 3등으로 졸업하였고, 수많은 정치적인 위기와 파벌 싸움속에서도 자신의 입장과 권력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수완가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가 입장과 권력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패전이 확실시 되자 츠지 마사노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것이란 설이 중론이다.


그가 공식적으로 남긴 말과 행보를 볼 때 출세길에 오르기 위해 남을 이용하고, 모략을 꾸미는 전형적인 권력지향형 인간이었던 점은 사실인 듯하다. 츠지 노유의 고향에는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흠좀무.



근성론과 활약(?)상


상식을 무시한 채 근성을 강조하였는데, "일본군의 정신력은 대단하고, 적군은 나약한 정신력을 가졌기에 백전백승한다."라는 주장을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계속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정신승리와 근성론은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군의 행동양식이지만 츠지 마사노부가 그 시초이자 일본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기에 근성론 = 츠지 마사노부로 통한다.



2.1 노몬한 전투(할힌골 전투)






츠지 마사노부 : 근성으로 돌격한다!
일선 지휘관들: 평원에서 닥돌이라니 이건 미친 짓이야. 당장 작전 수정해야 해.


츠지 마사노부: 닥쳐.




지휘관들의 이의가 수차례 건의되었지만 결국 작전은 실행되고야 말았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참패. 일본군은 다진 고기가 돼서 들판에 거름으로 뿌려졌다. 덤으로 그 당시 소련군 지휘관은 소련군 장성중에서도 개념인으로 유명한 게오르기 주코프.


그런데, 츠지 마사노부는 패전을 보고하면서 "소관의 작전계획은 완벽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와 감투정신의 부재로 패전."이라고 대본영에 보고한다.


결국 일선부대 연대장이 줄줄이 할복 자살. 일부 일본군 병사들(부사관과 장교 포함)은 처벌이 두려워 탈영하고 몽골-만주 일대의 마적단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처벌이 두려워 송환을 거부하고 소련에 남은 포로들도 있다고 할 정도. 일본군 다수가 탈주한 뒤 마적이 된 사태에 대해 조사가 진행되었고, 원인을 제공한 츠지 마사노부는 좌천당한다.



2.2 싱가포르 전투


노몬한 전투 이후 한직으로 내쫓겼다 천운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싱가포르와 말라야를 침공하던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25군에 참모로 임명되어 근성론을 앞세우며, 대한 독립을 위해 활약하기 시작한다. '작전의 신'이란 말을 공개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상관인 야마시타 토모유키가 얼마나 츠지에게 학을 떼었는지 후에 본인이 일지에 썼다는 인물평이 가관이다.



"츠지 중령은 제일선에서 돌아와 사견을 늘어 놓으며 여러 말이 많다. 이 남자는 고집이 세고 잔재주가 능한 교활한 자라서 국가의 큰 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소인이다. 이 남자에게 일을 시키려면 조심해야 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남긴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는 '교활한 인간' 이었다.


마사노부에게 큰 일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보아 야마시타의 평가는 매우 적절했으나, 도조 히데키는 이런 평가에 상관없이 마사노부를 중용했고 이는 뒤에 큰 파멸을 불러온다.



2.3 필리핀


야마시타 토모유키의 간청에 필리핀 14군으로 파견나간 작전의 신.


여전히 근성을 외치는 지휘를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14군 전체에 "미군 포로를 처형하라."라는 구두명령이 발신된다. 아무리 일본군이 포로 학대니 뭐니 악명이 높아도, 일단 당시 일본군의 방침은 포로의 생포였는데, 갑자기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의구심을 품은 대령 하나가 문서로 기록 된 공식적인 명령을 상부에 요구하게 된다.


갑자기 날아든 명령확인 요청에 작전본부(대본영)은 "그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라는 답변을 하게 되고 14군 내의 자체조사결과 츠지 마사노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포로의 감시를 엄중히 하라."란 명령을 포로 학살로 왜곡하여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명된다.


포로 학살 명령이 파견온 아저씨의 개소리란 것에 놀란 14군은 명령을 즉시 철회하지만, 이미 '죽음의 바탄 행진'(과 식량을 주지 않고 연합군 포로와 난민들을 다른 포로 수용소를 향해 행군시켰으며 탈락자는 총살했다)이 터지고 난 뒤라 10,000여명의 포로가 사망했다.


전쟁이 끝난 뒤 당시 14군의 사령관 홈마 중장은 바탄 행진이 일어나는 상황을 방치하였다는 죄로 전범 재판결과 총살형에 처해졌으나, 공식적인 개입이 확인 되지 않은데다 숨어있던 츠지 마사노부는 전범재판에 기소조차 되지 않아 전범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케하는 시비거리 중 한가지로 남았다.



2.4 
과달카날 전투


과달카날 전투는 이미 이치키 지대의 1차 공격이 전멸로 끝난 상태였기에 대본영은 전황 파악을 위하여 작전의 신인 츠지 마사노부를 과달카날로 파견한다.


가와구치 소장의 필사적인 2차 공격마저도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말려 패배한 상태에서 츠지 마사노부는 "근성으로 험난한 밀림을 빠르게 돌파한 후 대원 모두 착검한 채 야습한다."란 근성론을 기반으로 한 계획을 세운다. 2차 공격에서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경험한 가와구치 소장은 이런 "정신나간 계획은 전멸을 불러올 뿐이다."라며 좀더 합리적인 작전계획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미군은 비행장에서 테니스나 치면서 놀고 있고 가와구치 소장은 감투정신이 부족하여 소극적인 지휘를 한다."라고 대본영에 보고하여 가와구치 소장은 본국으로 송환되고, 츠지 마사노부의 지휘로 이루어진 '야밤에 반자이 어택'은 전멸로 끝난다.


태평양 전쟁 이후 작성된 미군의 문서에는 과달카날 전투에선 가와구치 소장의 2차 공격만이 미군에게 실로 지대한 위협이었다고 평가했다.


근데 멀리서 '돌격!'을 외치던 츠치 마사노부는 최전선에서 굶어 죽는 병사들을 보자 "あれは餓島だ(여기는 굶주림의 섬이다)", "길가에는 텅 빈 반합을 손에 쥔 채로 굶어 죽은 병사들이 무더기로 썩어가고 있다" 라고 대본영에 보고하면서 철수를 주장했다고. 뭥미?



2.5 패전 후 활약


방콕에서 마지막 패전 소식을 들은 뒤, "나는 민족의 재건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잠적했다.[1] 이후 전범 시효가 풀릴 때까지 은거해오다 시효가 풀리자마자 언론사에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기사를 내줄 것을 요구하며 일본으로 귀국했고, 태평양 전쟁 당시 자신의 눈부신 활약(헛소리들)을 책으로 써내 큰돈을 벌었고 이 돈을 선거자금으로 하며 정계로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2.6 정계 진출 후의 활약


그딴게 있을거 같아? 그냥 저냥 세월만 보내다가 68년 캄보디아로 여행간 후 실종된다. 단, 이게 단순한 관광 여행이 아니라, 당시 한참 격화되는 베트남전과 관련해서 2차 대전 때 자신이 깔아놓았던 비선조직들을 챙겨 모종의 일을 저지르려다가 미국 or 소련 or 중국의 손에 제거당했다는 가설이 설득력이 높다. 유력한 것은 라오스 반군들의 손에 죽었다는 설.



주변인들이 본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



3.1 
태평양 전쟁 당시의 평가


태평양 전쟁 당시 동료 장교들에게...


  • "상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매도하기 일쑤다."

  • "지휘관의 명령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독단 전횡을 저지른다."

란 평가를 받았으며, 특이하게도 도조 히데키는 " 장래에 국군의 요직을 충분히 떠받칠 수 있는 인물" 이라고 평가했다. 도조 히데키의 안목? 무다구치 렌야 따위가 심복이었는데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3.2 '개인'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


이런 막장 행보와는 달리, 놀랍게도 츠지 마사노부 개인에 대한 평가는 꽤 높은 편이다. 깔끔한 용모에 친절하고 심지 곧은 성격을 가지고 있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언제나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말도 안돼.


실제로 태평양 전쟁에선 항상 전선에서 현장의 분위기를 살피고 [2] 일선 병사들에게도 자주 나타나 병사들의 생활고충을 듣고 사치를 부리는 부하 장교들을 벌 하는 등 모범적인 장교의 모습을 보였는데 이 행동에 대해 동료 장교들은 시찰을 나가고 병사의 상담을 자처하는 츠지 마사노부의 행동을 기행으로 취급하여 개인적인 처신과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크게 다르다는 사례를 남기었다.


초급장교 코스를 밟으며 중대장으로 있을 땐 부대원들이 그를 신처럼 숭배햇단 일화가 전해지며, 훈련중 낙오한 중대원을 들처업고 대신 소총을 들고 돌격한 일화도 있다. 


또한 25군의 직속 상관이던 참모장 이케타니 한지로는 "일반병들을 잘 대해주니 최전선의 사단 참모로 굴리면 딱이다."라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종합적인 평가


"무능하면서 성실한 지휘관은 유능한 적군보다 더 악랄한 적이다."


어느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개인'의 정의와 목표에 지나치게 얽매였고 나아가선 도모한 일이 실패할 경우 책임을 지지 않는 인간이었다.한마디로 책임감 없는 이상주의자.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은 직간접적으로 수만은 된다.


종전후 작성되어 2005년경 공개된 CIA 극비문서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는 남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만화 지팡구에도 등장하는데 역시나 여기서도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답게근성론을 부르짖는다. "물량이 제한적인데 반해 인간의 정신력은 무한하다." "필승의 신념이야말로 우리 야마토 민족의 최대 무기"라는 병맛 넘치는 대사가 그것. 그런데 쿠사카가 츠지 마사노부 머리에 권총을 들이밀며 '그 필승의 신념으로 이 총알을 피한다면 무한한 정신의 능력을 인정하겠다'라고 하자 바로 버로우탄다(...)


모에 전차학교에서도 잠깐이지만 과달카날에서의 츠지 마사노부를 까는 것으로 보아 일본 내에서도 평가가 안 좋은 듯.대한민국 독립유공자라서 일본 내 평가가 안 좋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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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6년 9월에 태국의 라마 8세가 의문의 총기 폭발 사건으로 죽었는데 탈출을 위해 츠치 마사노부가 관여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2] 노몬한 사건 직전 당시 관동군 참모부가 참모들에게 적정시찰을 지시하면 츠치의 보고가 가장 세밀했다고 전하며, 흑룡강 부근의 조사 임무를 맡았을 때는 직접 헤엄쳐 조사했다고 한다(…). 




토미나가 쿄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구 일본군 장성. 그리고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Contents
1 소개
2 신이 내린 줄타기 능력과 낙하산 인사
3 닥치고 카미카제
4 적전도주
5 후대의 평가

1 소개 ¶

무타구치 렌야를 능가하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무능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추대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일본에서는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와 함께 삼대오물이라 불리며 태평양 전쟁 얘기만 나오면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까이고 까이고 또 까여서 가루가 되는 인물. 다만 무타구치 렌야나 츠지 마사노부같은 병맛허세포스가 없기에 한국내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그러나 병♡력 하나만큼은 둘을 압도한다!
2 신이 내린 줄타기 능력과 낙하산 인사 ¶

그의 군사적 역량은 전혀 뛰어나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신이 내린 줄타기 능력이 있었다.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도조 히데키 라인을 탄 그는 정계와 군부, 재벌을 잇는 뇌물셔틀 역할을 하면서 도조 히데키의 돈주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라인을 잘 잡은 덕분에 참모본부 참모와 관동군 보병사단 참모를 차례로 역임했으며,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장을 거쳐 육군 차관까지 오른다. 그러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8월, 그의 보스 도조 히데키가 실각하면서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그런데 토미나가의 다음 자리가 문제였다. 같은 삼대오물로 불리는 스기야마 하지메마저도 토미나가가 무능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뒤를 봐주는 세력이 워낙 든든했기에 "이 놈을 대체 어디에 배치해야하나." 상당히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기야마가 생각해 낸 것이 1944년 당시로서는 가장 안전한 전선이었던 남방 전선이었다. 그리하여 1944년 9월, 토미나가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3 닥치고 카미카제 ¶

그런데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토미나가는 항공군을 지휘한 경력이 전혀 없었다. 기본적인 항공전 전략 전술조차 하나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차라리 무능하면 가만히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항공기를 출격시킬 때마다 군도를 휘두르며 "발진!"을 외쳤다.중2병 돋네 전후 참모들이 회상하기를, 어차피 파일럿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았으며 쓸데없이 활주로 바로 옆에 나가서 군도를 휘둘러서 이륙에 큰 방해가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가 저지른 최악의 병크는 카미카제로 귀중한 육군 항공 전력을 말아먹은 것이다. 1944년 9월 카미카제 허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토미나가는 줄기차게 특공을 지시했으며, 총 62차례 카미카제를 시도하여 전투기 400여기를 잃었다. 심지어 기체가 고장나서 귀환하거나 간신히 생존한 대원마저도 충성심이 부족하다며 훈시하고는 다시 전투기에 태워 특공을 보냈다. 당장 카미카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카미카제는 비인간적인 전술일 뿐만 아니라, 귀중한 항공기와 파일럿을 일회용 폭탄으로 삼아서 10회 시도 중 1회 성공할까 말까한, 전술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뻘짓이다.
토미나가의 특공 명령 덕분에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서진하는 미군에게 위협적인 전력이 되었을 일본 제4항공군의 항공 전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미군의 수를 생각해보면 제4항공군이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 본토 혹은 필리핀 탈환전 방위에 나섰을 경우 미군에게 더욱 격심한 출혈이 강요되었을 것이 뻔하다. 이를 예방했다는 점에서 토미나가가 어느 정도로 미군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고 대한독립에 기여했는지뻘짓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특공하는 항공대원들 앞에서 술을 마시며 자주 이렇게 훈시했다.
"제군들은 이미 신이다. 제군들만 보내지는 않는다. 본관 역시 마지막 일전에서 특공혼을 불살라 제군들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공혼을 불사르기는커녕 평생 전투기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
아니, 전투기를 타기는커녕...
4 적전도주 ¶

1945년 1월이 되자 일본의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가장 안전했던 남방전선은 임팔 작전의 대실패로 영인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공해 미얀마까지 탈환했으며, 태평양의 미군은 레이테 만 해전 이후 필리핀까지 밀고 들어왔다. 미 해군은 해가 바뀌자마자 이미 마닐라 코 앞까지 와서 해병대의 상륙을 위한 함포사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1월 16일, 토미나가는 위궤양이 악화되었다면서 수송기를 타고 대만의 타이페이 기지로 이동한다.[2] 즉, 남방 전선 전역의 제공권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이 적전도주한 것이다. 그가 도주한 덕분에 제4항공군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2월 13일 해체되어 육군 보병으로 편제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필리핀 탈환전에서 미군에게 희생되었으며[3], 육군의 주력 전투기 하야부사는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못해보고 고스란히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 손에 넘어갔다.

그런데 토미나가는 적전에서 도망쳐 온 주제에 대낮에 군용차에 기생을 데리고 다닌데다 위궤양이 심하다고 온천을 갔다. 이런 개념없는 행동으로 순식간에 대본영 전체에 토미나가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으며 어떤 병사도 그에게는 경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위에서는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최후를 맞으라며 할복을 권유했으나 그는 끝끝내 거부했다.

1945년 2월 초, 그는 직속상관인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에게 위궤양 진단서를 떼서 그의 행동이 적전도주가 아니었다는 인증을 받으러 갔다, 당연히 야마시타 중장은 빢쳐서 "부하를 버리고 도주하는 놈 따위와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며 문전에서 박대했고 그의 승인은 각하되었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이 미군의 손에 들어가고 영인군이 인도차이나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 일본 육군은 찌질이 중장 한 명에게 신경쓸 틈이 없었고 군법회의도 어영부영한 끝에 예비역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일본군 육군 본부는 "적이 무서워 적전도주한 놈에게 본토에서 예비역으로 편하게 살라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이유로 1945년 7월에 그를 현역으로 불러들여 시베리아 가서 조뺑이쳐봐라[4]'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139사단 사단장에 임명한다'는, 일본군으로서는 보기 드문 개념찬 인사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토미나가는 상부의 계획대로 8월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어 소련군이 만주로 밀고 내려오면서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고 소련의 수용소에 억류되었고, 하바로프스크의 굴라그에서 10년 가까이 수용소 생활을 겪은 후 소련-일본 국교 정상화로 포로송환이 가능해지면서 1955년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1960년 노환과 소련 수용소 생활의 후유증이 겹쳐 사망했다.
5 후대의 평가 ¶

일본에서는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와 묶여 삼대오물이라 칭해지며 태평양 전쟁을 패전으로 이끈 천하의 개쌍놈들 취급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토미나카는 카미카제로 멀쩡한 항공 전력을 말아먹고 무엇보다 군 사령관이 적을 눈 앞에 두고 도망쳤으며 이로 인해 남방전선 항공군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쉴드쳐줄 곳이 하나도 없는 점에서 무타구치 렌야[5]와 함께 끊임없이 까이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 인간은 할줄 아는게 하나도 없었다. 기본적인 업무소양이 있었던 두 사람과는 달리 정말 아무것도 할 줄 아는게 없는 놈이었다.[6] 오죽했으면 스기야마마저도 이 인간을 어디다가 배치해야 할지 고민할 정도. 차라리 토미나가에 비하면 무타구치와 스기야마가 개념인으로 보일정도다. 결국 삼대오물이라는 발언조차도 무타구치나 스기야마에게 실례가 되는 말이 될 정도다.

의외로 자식 농사는 정말 잘 지었는데, 바로 그 아들이 특공으로 생을 마감했다. 장남 토미나가 야스시는 삼대오물인 아버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범적이고 훌륭한 군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기에 징집되지 않았으나,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본토 방위를 위해 육군 소속 항공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리고 1945년 5월에 아버지가 준 일장기를 들고 오키나와 전투에 출격했으나 전세가 기울자 특공으로 22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물론 특공이 잘하는 짓은 절대로 아니지만, 사령관인데도 충성심과 책임감을 쌈싸먹고 적전도주한 아버지와는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하늘과 땅 차이인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와는 정반대되는 인품의 토미나가 야스시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특공을 나가기 직전에 101항공단의 한 참모에게 격려를 받았는데, 무서워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혼자서 당당한 모습만을 보이며 출격했다. 그가 특공으로 산화한 후, 그 참모가 "그 용감한 청년은 대체 누구였는가?"하고 물어보니 "그 토미나가 중장의 아들입니다."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듣고 놀라며 이 청년의 죽음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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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도미나가 교지'
[2] 그 와중에도 총애하는 기생들을 데리고 갔으며, 수송기의 남은 공간에는 위스키를 실었다. 위궤양이라며?
[3] 필리핀 탈환전에서 미군과 일본군 40만 vs 40만 드림매치에서 미군 1만여명이 전사하고 일본군 39만여명이 전사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보면 대부분이 필리핀에서 뼈를 묻었다고 봐야한다. 그래도 필리핀 방면군 총 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여타 일본군 지휘관들과 달리 제법 군사적 능력이 있어 7개월에 가깝게 지연전을 수행해냈다. 이 때문에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훗날 전범재판에서 맥아더를 7개월동안 필리핀에서 붙잡았다는 죄로 죄수복을 입은채 교수형을 당했다 안습
[4] 이미 독일이 1945년 5월에 항복했고, 1945년 4월 소련 측에서 일방적으로 소일 중립조약을 파기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만주에서 옥쇄하라는 명령이나 다를바 없다.
[5] 사실 무타구치는 그보다도 병맛쩌는 명언망언들과 전후에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뻔뻔함 때문에 까이는게 더 많다.
[6] 무타구치의 경우 임팔 작전시 기생집을 차리고 놀긴 했어도 초반에는 정해진 업무시간에는 그런대로 일처리는 했다지만...토미나가는 그런거 없다.



이 인물로 따지면 존나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단 두가지만 알면 된다.


이름은 스기야마 하지메이며. 태평양 전쟁을 시작케한 장본인이며 그 태평양 전쟁을 벌이게 만든 말이 최고 최강의 명언이였다.


그 명언은 다름아닌 일왕에게 "미국은 그저 3개월 변신 찌끄러기에 불과할 뿐이다."

라고 말을 했는데 사석에서 그냥 허세부린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