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를 두고 '새로운 형식'이라고 구라를 치는 것은'잊어버리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에 불과하다. 나꼼수는 딴지일보의 라디오 판본일 뿐이기 때문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딴지일보보다도 훨씬 후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딴지일보가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가치중립적 태도에 있었다. 딴지일보가 탄생할 무렵만 해도 우파들을 공격하는 것은 곧바로 좌경용공세력으로 규정받던 시절이었다. 이런 냉전적 잔재가 남아 있던 시기에 딴지일보는 풍자와 조롱이라는 무기를 들고 피아의 구분을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감각적 나눔'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자유주의 연대의 확산에 복무한 김어준의 기여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독재권력이 임의로 그어놓은 '분할' 자체를 애매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점에서 딴지일보는 자신도 모르게 미학의 정치성을 실천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나꼼수는 이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봉주 전 의원과 주진우 기자라는 '전문가'를 한 축으로 하고, 김어준과 김용민이라는 재담꾼과 만담꾼을 한 축으로 하는 구도는 구태의연할 정도로 전형적이다. 딴지일보가 그랬듯이, 이들은 언제나 공격대상보다도 '한 수' 위에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대중을 아래로 본다'는 혐의를 김용민 같은 광대를 통해 무마한다. 이렇게 구성된 '우리 편 드림팀'의 공격대상은 권위에 절어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한 우파이다. 이런 권위적 꼰대 우파를 공격하는 마니교적 선악이분법과 계몽주의가 뒤섞인 묘한 정서가 이를테면 나꼼수의 인기를 지속시키는 영양분인 것이다. 선악이분법으로 인해 계몽주의를 가감없이 발산하는 이들의 꼰대성이 검토대상이 아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구도는 이상하게도 지금 나꼼수를 중립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반이명박 전선이라는 새로운 상황 때문이다. 과거 김어준이 '총수'로서 대선 후보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던 그 중립성이 사라지고, 정파성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정치코미디라는 장르의 법칙을 압도한다. 코미디가 갑자기 실화가 되는 역전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나꼼수는 본인들 의사와 상관 없이 특정 정파의 전위 노릇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반이명박 전선의 전위부대가 되는 셈이다. 나꼼수가 정치코미디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정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나팔수가 되어버리는 이 현상이야말로 문제적이다.
과연 이것이 나꼼수가 원했던 것일까? 오히려 나꼼수는 권력에게 밉보인 사드적인 희생물을 자처함으로써 아버지의 억압을 극장화해 장사를 해볼 생각이 아니었을까? 물론 상황이 주체를 만드는 것이라면, 나꼼수도 얼마든지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만큼 이런 정파적 태도를 취함으로 인해 애초에 구상했던 활동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나꼼수를 표상으로 해서 자칭 진보개혁세력들이 과거 노무현 지지자들이 보여준 '자뻑'의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 종교의 신도들이 모여서 무슨 부흥회를 하든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소음이 요란해서 정상생활을 못할 지경이라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나꼼수가 이 상황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른바 진보의 대표를 자임하게 된다면 향후 진행될 선거국면에서 진보개혁세력의 입지는 약화되고, 더불어 정치적 생태계를 구축해야하는 좌파에게도 상황은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나꼼수 자체야 하나의 오락거리라고 치부하더라도, 지금까지 전례에 비추어 판단하건대, 그 지지자들이 벌이는 '오직 나꼼수'라는 반정치적인 행태는 이명박으로 향했던 그 냉소와 조롱의 화살을 언제든지 좌파의 '특이성'을 향해 겨눌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우석훈은 '바뀐 김어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지금 김어준의 명성을 만들어놓은 것이 반지성주의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바뀌었다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조선일보는 이런 나꼼수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일보는 지금까지 '가짜 좌파들'을 진짜 좌파로 규정해줌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지켜온 측면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강남좌파에 대한 규정은 강남 내에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를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사학적 장치이다. 강남좌파의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강남 내에도 엄연히 현시하고 있는 계급적 차이를 무마하고, 강북과 강남을 대립시키는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근 출간된 강준만의 <강남좌파>는 이런 조선일보의 프레임을 그대로 답습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조선일보의 의도에 복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꼼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눈 찢어진 아이" 발언이야말로 정확하게 조선일보의 의도에 부합하는 해프닝이었다. 곧바로 조선일보는 저질시비를 끌고 들어와서 좌파 전체를 '저질'로 프레임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나꼼수 지지자들에게 어처구니 없는 일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이 프레임은 노무현 정부를 '막말 정권'으로 이미지화해서 진보개혁세력의 기획을 좌초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국 사회는 보수적이라서 자신이 듣는 프로그램이 '저질'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용은 고상한데 대중에게 친근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탈권위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나쁘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 내용 자체가 저질이라고 낙인 찍히면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정확하게 어디에서 싸워할지를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꼼수가 정치코미디로서 자리매김에 실패하고 정파적 '언론'을 표방하는 순간,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하튼, 앞으로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언론이 아니라 정치코미디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나꼼수의 한계는 명백하다. 다만 그냥 정치를 소재로 즐길 수 있는 코미디프로그램이라고 자신을 한정짓는다면, 최소한 김어준과 김용민이 김구라나 황봉알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정권이 바뀐다고 해도 이들을 예능프로그램에서 보는 일 이외에 기대할 일은 별로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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