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 때에 가물면 석 자가 마른다고 했는데, 다행히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옛날엔 곡우날 비 오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했다.
잠언과 속담은 인간이 이룬 최대의 업적이다.
그러나 그 업적에도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으리라는 걸 오늘에사 알았다.
자치단체에서 마을마다 운영하는 무료급식소가 있는데 전부터 그곳을 꼭 한번 체험해보고 싶었다.
마침 부인이 그 급식소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왔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다행히(?) 친구도 대머리라 무료 급식소 입장은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급식소는 바깥의 긴 복도와 두 칸의 방이 전부였는데, 우린 할아버지들만
옹기종기 모여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다가 빈 자리를 잡아 앉았다.
아랫목엔 여든이 넘는 어르신들이 점잔히 앉아계시고, 일흔 남짓한 한 노인이 상에다 수저를 차리는 중이었는데
우릴 힐끔 쳐다보며 꽤나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전후좌우를 살펴보니 아뿔싸, 우리가 앉은 위치가 그 여든자리 복판이었다.
내가 자릴 잘못 잡은 걸 혹실히 알아차린 건 그 수저를 차리던 노인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난 다음이었다.
그 수저 노인이 두 번이나 눈치를 주었는데도, 예순을 겨우 넘긴 우리는 끈질기게도 그 좌석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군대 '빳다' 이후 남에게 엉덩이를 맞아본 적이 없었는지라 항의라도 해야겠다싶어,
적당한 표정관리를 한 다음 뒤를 돌아다 봤다.
어헉! 이 무슨 변고인가! 뒤엔 늘 라디오를 들고 다니시는 내 아버지 친구이신,
일명 '트란지스타 영감'께서 떡하니 나를 노려보고 계시는 것이었다.
나는 일등병 점호 복창하듯이 부동자세로 섰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비도 오는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그간 기체만강..." 어쩌구 저쩌구, 잔뜩 주눅이 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지껄여댔다.
"자네, 아무게 아들이지?"
"예, 그렇습니다!"
"아직 살아있나?"
"예, 살아계십니다."
함께 온 친구는 합바지 방귀 새듯이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잘 하거래이. 살아 생전에."
"예, 알겠습니다."
"밥은 반 그릇만, 멸치는 빼고!"
"예?"
"치근이 물러서 몬 씹는다카이."
나는 다시 일등병 시절로 돌아가 전후좌우로 눈알을 굴려보았다.
수저노인이 식판을 들어다 아랫목으로 배달하면서 내게 세번째로 눈치를 주었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심호흡을 한번하고 생각하니, 아하! 그곳이 지정석이었구나.
언감생심 내가 세번째 자리에 앉아 버텼다니!
부지런히 그 방에다 식판을 갖다 날랐다. 멸치는 빼고...
13시 30분,
주방에서 나오는 큰 소리의 생방송,
"급식을 마칩니다. 식판은 원위치로 갖다 주세요."
나는 트란지스타 영감이 수저를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무 개의 식판을 거둬 날랐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뿌듯한 기분으로 모처럼 효도라도 하는 양, 마음이 넉넉했는데 그건 그때까지였다.
나는 트란지스타 영감을 깍듯한 인사로 전송하는 중이었다. 영감의 라디오엔 '가거라 삼팔선아'가 흘러나왔다.
"그럼, 편히 가십시요."
영감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김가야, 이제 오면 우짜노! 밥 시간이 끝난기라! 개도 일찍 깨야 뜨신 똥을 묵는기라."
굶지 않는다는, 비 오는 곡우날에 친구는 불어터진 짜장면을 신문지로 덮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작업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렁이 (0) | 2009.06.05 |
---|---|
해장국집 여인의 눈물.... (0) | 2009.06.05 |
수초같은 아내 (0) | 2009.06.05 |
세상을보게 해준 창문 (0) | 2009.04.24 |
목동에사는 입던빤스 팔던 지숙이를 아시나요 (0) | 2009.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