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세대에나 아이콘이라는 게 있습니다.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면서도 비슷한 나이대라면 무언가를 보거나 혹은 들었을 때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말입니다. 나에게 김광석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런 아이콘이며 코드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 스무살에서 서른살 즈음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김광석이라는 가수를 모를 수가 없고 그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공감대를 느끼지 못할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얼굴도 별로 잘생긴 편이 아니고 세련된 창법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약간은 투박하기까지 한 목소리이고 모습이지만 그가 처음 등장했던 1988년 무렵부터 그가 홀연 세상을 떠난 1996년 그해 1월까지 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 한 시절의 상징이었고 그때 우리들의 슬픔과 기쁨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아이콘이었음을 부인 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스물중반의 청년들이 중년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문득 문득 그의 노래를 들을때면 오랫동안 잊고있던 것들 그때 사랑했던 것들 그때 중요했던 가치들과 지금은 유행이 지났다고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하는 코드이기도 하죠. 그가 떠난지 벌써 12년을 지나 13년이 다 되어갑니다. 10주년이었다고 감상에 젖었던게 어제처럼 기억에 있는데 어느새 13년이라니.. 그 이름을 잊고 산 시간만큼 잊어서는 안될 것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산건 아닌지 죄책감마저 듭니다. 오늘따라 어쩐지 그가 무척 보고 싶습니다.
그는 동물원의 멤버였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노찾사의 멤버였다고도 하죠. 동물원 앨범에서 '거리에서'와 '흐린가을하늘에 편지를 써'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투박하지만 또 뭔지모를 끌림이 있었습니다. 스무살 언저리 쯤의 감성에 딱 어울리는 너무나 공감이 되는 가사와 꾸밈없는 기타, 그리고 조금은 촌스러운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예감이 들었습니다. 어쩐지 이 사람은 오랫동안 기억 하게 될것 같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기서 그를 추억하는 마흔도 훌쩍 넘긴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동물원 2집을 끝으로 솔로로 독립합니다. 1집 앨범의 모든 곡들이 주옥같지만 특히 '기다려줘'는 한때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너를 이해할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달라는 조금은 어이없고 이기적이기 그지 없는 가사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요. 원래 사랑이란게 그토록 이기적이라는걸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내가 사랑하던 세상, 그리고 사람들에게 부탁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갈수 있을때까지 마지막으로 헤어진 그자리 그대로 있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물론 부탁은 해도 기대는 없습니다. 제멋대로긴 하지만 그렇게 뻔뻔하진 못합니다. 그리고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사랑하게 해달라고 나 좀 잡아달라고 적반하장 격의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같은거 사랑해줄 이유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의 음악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의 전반부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그대"에 대한 사랑이며 그리고 2집은 그것의 절정입니다. 여기서 그가 노래하는 "그대"란 적어도 내게는 여러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스무살적 내가 사랑에 빠져있던 어느 여자애이기도 했고 내가 당시 가졌던 신념이기도 했으며 내가 사는 세상이기도 했지요. 그렇게 참 많은 다양한 "그대"들이 나와 함께 했습니다. 사랑은 역설입니다. '사랑했지만' 때론 눈물도 흐르고 때론 가슴도 저리고 결국엔 떠날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할수 있어서 기뻤지만 바로 그 사랑때문에 훨씬 오랫동안 아파할거란 걸 압니다. 그러나 알고 있어도 결코 주저할 수는 없지요. 알면서도 한순간 사랑했다가 가슴에 묻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랑했지만 바로 그 '사랑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미련이 남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우겨대며, 아직 기회가 있을거라며 허망한 기대를 가져보기도 하지만 이미 알고 있죠. 사랑이라는 잔치가 끝나고 나면 누구든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면 그렇게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습니다.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있도록 '슬픈노래'를 부르며 말이죠. 진짜로 '그날들'을 기쁘게 추억할 수 있게... 그럴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나의 세상을 얘기하며 체념해갑니다. 너는 나의 정원을 본적이 있을까 국화와 장미 예쁜 사루비아가 끝없이 피어 널 부르는 언제든 그 문은 열려있는 나의 정원 언제까지나 널 기다리고 있는 정원을 그녀에게 노래합니다. 무슨 소리를 해서든, 어떻게든 붙잡아 놓고픈 안간힘 그렇게 그와 함께 체념을 배워갑니다. 그렇게 1년이 갔고 다시 그의 세번째 앨범과 만났습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 또 그 세상에서 만난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 그들을 향해 사랑해를 여전히 썼다지우고 다시 씁니다. 지워야 한다는걸 알지만 차마 지울수 없기에 지우는 손끝이나 다시 새로 쓰는 손끝이나 매번 매순간 모두가 애처롭습니다. 드디어 사랑은 미련이라는걸 배웠습니다. 사랑을 시작하고 그 사랑에 아파하다 이별과 미련에 슬퍼하고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이제 그가, 우리가 조금씩 커갑니다. 그리고 떠나간 모든 것들에게 외칩니다.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서 '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고 싶다고 그가 노래합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옆에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노래합니다.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이며 그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의 고백을 듣습니다. 깨닫고 뜻을 세운 사람의 결연함과 여유와 기쁨같은 것을 느낍니다. 바로 여기서 그와 내가 갈라지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떠났고 나는 아직 살아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발랄한 리듬과 신나는 노래였지만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 체념과 미련 끝에 도달한 희망과 기쁨이기에 오히려 슬픕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들을때면 슬픈 노래는 물론이고 기쁠 때 조차도 언제나 마음이 한구석이 그리 아팠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는 그와 함께 서른이 되었습니다. 스무살적에 서른이라는 나이는 너무도 까마득했습니다. 그리고 기대도 되었죠. '서른즈음에' 무언가 지금 혼란스럽고 알수 없는 것들이 정리되고 분명해질거라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진짜 어른이 될수있을거라 생각했죠. 서른살이라는게 단순히 삼십번 떡국을 먹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건너는 신화이고 엄숙한 의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른인척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아는 척을 했고 무슨 일에든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더 많은 거짓말을 연구해야 했었고 더 그럴듯하게 말하는 법을 연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흔이 되면. 진짜로 마흔이 된다면.스무살 열병의 미련과 체념을 지나 이제 그가 사랑을 부정합니 다. 그렇지만 부정이란 무엇을 단순히 지우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부정을 통해 새로운 무엇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절대 부정할수 없는 것들을 부정하는 강한 부정은 도리어 강한 긍정이라고 받아들여지기도 하죠. 애틋하고 고통스러웠던 스무살. 그 스무살을 부정하며 그가 작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제 그의 그대는 오로지 그대만을 위한 그대가 아니라 더 많은 그대 들을 향한 사랑. 바로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제 실수나 아픔같은거 다 털고 일어나 우리 가 느끼며 바라보야야 할 하늘과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꿈들을 위해 이제 '일어나' 가자 합니다. 그곳은 꿈에서 보았던 햇살이 눈부신 곳 나뭇잎이 손짓하는 곳 그러나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입니다. 1964년생인 그가 서른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부른 두편의 그의 다시부르기는 그래서 흥미로왔습니다. 스무살의 방황을 마친 그의 서른살 노래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어떤 얘기를 들려줄까. 연인과의 데이트를 기다리듯 설랬습니다. 세상이었습니다. 그가 다시 부르기에 담았던 노래들은 여전히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지만 '너무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그의 눈은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땅에서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닌 40대라는 숙명 말입니다. 그리고 인생도 있었습니다. 살아가고 만나고 헤어지는 세상의 기쁨과 슬픔 같은 세상의 심각한 것들에는 꼭 사랑만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종류의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그 시절의 철없던 기억들과도 만납니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그모습을 보며 어쩔줄을 모르던 황당하고 귀엽기까지 한 기억.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무오류 의 신화를 믿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라 믿었던 그 시절 겪었던 아득하고 아픈 사랑에 대한 기억. 무덤덤하게 '변해가는' 그래서 침묵으로 잠들어가는 오늘을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그는 정말 먼지처럼 훌훌 사라졌고 그의 미쳐 다 부르지 못한 노래는 영원히 부치지 못한 편지로 남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혼자서 그가 가보지 못한 마흔을 넘어서 갑니다.
스스로 왜 아직도 그렇게 김광석이냐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나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냥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조금은 솔직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의 어떤 노래를 듣던 그 노래와 처음 만나던 때가 오버랩되면서 그때의 마음을 기억하고 다짐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내게 거울과도 같습니다. 않았습니다. 신문에서는 자살이라고 했지만 의심쩍은 구석이 있다고도 했죠. 그리고 남은 자들의 추접한 싸움이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것들은 적어도 내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살이든 혹은 음모든 그의 판권을 누가 가지고 누가 대박을 맞든 그가 이 세상에 없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그의 콘서트를 볼수 없을 것이고 다시는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너무 아팠습니다.
공연이 중반을 넘어섰고, 다들 축하해 주고 그 움직임이 불쌍하다
- 김광석 1995년 8월 즈음
나는 그를 내가 결혼할 즈음에 알았고 그는 서른두살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토록 치열했던 그의 서른즈음 을 들려줬던 것처럼 나는 그가 어떤 서른을 지났는지 다시 다가올 그의 마흔은 어떨른지 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곧 그와 함께 나의 서른과 마흔을 비교해보고도 싶었죠. 하지만 그는 영원한 서른 즈음으로 남았고 마흔 즈음의 이야기는 이제 나만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어쩌면 이제는 내가 그에게 마흔살을 얘기해줄 차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01 거리에서 02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03 기다려줘 04 사랑했지만 05 사랑이라는 이유로 06 슬픈노래 07 그날들 08 나무 09 나의 노래 10 잊어야한다는마음으로 11 서른즈음에 12 일어나 13 바람이 불어오는 곳 14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15 그녀가 처음 울던 날 16 이등병의 편지 17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18 새장속의 친구 19 내사람이여 20 변해가네 21 불행아 22 바람과 나 23 너에게 24 잊혀지는 것 25 먼지가되어 26 그대의 웃음소리 27 광야에서 28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29 말하지 못한 내사랑 30 그루터기 |
더구나 군생활 3년 중에서 1년만에 비교적 일찍 내무반장을 맡아 늘 가슴을 억누르는 무한의 책임. 매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으로 마음 편치 않은 군생활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푸른시절의 돌아 올 수없는 추억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 시절 부른 거리에서,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서른즈음에, 이등병의 편지,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등 수많은 곳을 부르고 또 리메이크하며 원곡보더 더 낫다는 평을 들으며 우리에게 다가온 그가 1996년 1월 6일 김광석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인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사인은 자살로 판명됐고, 가장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던 시기인 데다 아무런 유서도 발견되지 않아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지나간 그의 추모공연과 함께 관련기사를 소개합니다. - 한국의산천 -
꿈꿀 수 있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늘 꿈을 꾸면서 살아갑니다.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도 있고, 전혀 황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요.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늘 희망 적입니다. 이룰 수 있는 꿈이건, 이루지 못한 꿈이건 꿈을 꿀 수 있 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린 행복합니다.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 저는 언제나 그 얼굴이 되고 싶습니다. [김광석의 '수첩' 중에서]
김광석의 마지막 콘서트 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는 위 콘서트가 끝나고 7시간후에 자택에서 자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 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 내리는 못다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되어 고개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하루 바람이 젖은 어깨 스치며 지나가고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 버리기 못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의 통기타 노래가 그립다' 김광석 12년 추모콘서트 [2008. 1. 6 ] ▲1993 학전블루에서 김광석 ▲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서른즈음에/변해가네 3곡이 연속 재생됩니다. 노래 다시 부르기의 명반 이등병의 편지. 친구들아 군대가면 편지 꼭 해다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않게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헤어스타일은 5:5 갈매기형 스타일의 순진한 수줍음을 타는 듯한 모습의 김광석. 큰형이 군에서 사고로 죽자 김광석은 6개월만에 제대하고 부른 노래 이등병의 편지는 형을 그리는 노래였을까? 자신을 돌아보는 노래였을까... 그는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노래 하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영원한 이등병입니다. 왜냐하면 큰형이 군에서 사망하셔서 그 혜택으로 6개월만에 제대를 하였습니다"라며...그리고 쓸쓸히 웃는 모습의 동영상을 접한것이 2002년이었다. 나는 그의 노래중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면 나의 지나간 3년의 군생활이 떠오른다. 꿈에서 조차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이다. |
더구나 군생활 3년 중에서 1년만에 비교적 일찍 내무반장을 맡아 늘 가슴을 억누르는 무한의 책임. 매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으로 마음 편치 않은 군생활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푸른시절의 돌아 올 수없는 추억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 시절 부른 거리에서,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서른즈음에, 이등병의 편지,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등 수많은 곳을 부르고 또 리메이크하며 원곡보더 더 낫다는 평을 들으며 우리에게 다가온 그가 1996년 1월 6일 김광석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인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사인은 자살로 판명됐고, 가장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던 시기인 데다 아무런 유서도 발견되지 않아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지나간 그의 추모공연과 함께 관련기사를 소개합니다. - 한국의산천 -
꿈꿀 수 있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늘 꿈을 꾸면서 살아갑니다.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도 있고, 전혀 황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요.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늘 희망 적입니다. 이룰 수 있는 꿈이건, 이루지 못한 꿈이건 꿈을 꿀 수 있 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린 행복합니다.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 저는 언제나 그 얼굴이 되고 싶습니다. [김광석의 '수첩' 중에서]
▲ '영원한 가객' 김광석 노래비 제막식
'이등병의 편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붉은 천에 싸여 있던 김광석의 노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1996년 1월 6일(음력 11월 15일) 세상을 떠난 고 김광석이 1991년부터 95년까지 1천회 공연을 펼쳤던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 블루 앞마당에서 6일 오후 그를 기리는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병자년(丙子年)에 세상을 떠나 무자년(戊子年)인 올해로 꼭 12주기가 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장인 조각가 안규철 교수가 만든, 브론즈 부조가 대리석 단상에 얹힌 노래비에는 통기타를 치고 있는 생전의 김광석이 담겨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들을 수없이 찾아내 우리들에게 들려준 영원한 가객(歌客) 김광석(64~96), 그가 95년 8월 11일 이곳 학전 소극장에서 콘서트 1천회를 맞았다'는 글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이날 제막식에는 김광석추모사업회 김민기 회장, 김광석의 형인 김광복씨, '서른 즈음에'를 작사·작곡한 강승원씨, 박학기·동물원·유리상자·드렁큰타이거·김제동·윤도현·작곡가 김형석씨 등 동료와 팬클럽 둥근소리 회원들이 참석했다.
제막식에 이어 작은 음악회도 마련됐다. 1996년 그의 49제 때 연세대학교, 99년 학전 블루에서 열린 후 세 번째 추모공연이다.이날 관객들은 김광석의 노래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공연 중간, 김광석의 생전 영상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어요. 또 환갑 때 연애하고 싶어요. 로맨스. 쉽지 않겠지만 바람입니다." [부산일보]
노래만 해야지. 난 노래만 해야지.” [문화일보]
15년 전 그 때처럼 학전 소극장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무대 한 쪽에 걸려있는 김광석의 사진을 올려다보며 이소라는 나직이,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가끔 나는 왜 연예 프로그램에서 안 불러줄까 생각하다가도 광석 오빠를 떠올리면 늘 생각해요. 그래, 노래만 해야지. 난 노래만 해야지.”
이어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흐르는 ‘서른 즈음에’의 반주.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파편화해 떠돌던 저마다의 기억들이 순간 어느 한 지점에 응축된다. 사람들의 가슴은 이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김광석이 죽은 지 12년이 되는 지난 6일,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는 김광석의 노래비 제막식과 추모 콘서트가 열렸다. 그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무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울고 웃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광석의 친구 박학기는 “사람들이 오며 가며 광석이를 만나고 싶을 때 꽃 한송이, 소주 한 잔 놓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기쁘다”고 했다. 형 김광복씨는 “광석이가 대구말로 ‘형아’ 하던, 고집스럽고 장난기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광석아 이제 억울해 말고 잘 지내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해 너무 좋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좁디좁은 학전 소극장 앞마당은 삶 속에 김광석의 노래를 체화한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는 지난 96년 서른 둘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뭇 ‘대중’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4장의 정규 음반과 베스트 앨범 등 그의 음반 판매량은 500만장을 넘어섰다. 사람들은 왜 그의 노래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의 노래는 대중가요나 민중가요이기 이전에 ‘삶의 노래’였다. 사람들의 인생 안에 녹아들어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군대에서 혼자 부르기 시작한 ‘이등병의 편지’가 ‘떼창’이 된 기억, 연인과 헤어진 후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던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 등 추억담은 끝이 없다. 무언가 뜨겁고 절실했던 시절, 시대적인 집단 기억도 한몫했다. ‘광야에서’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등의 노래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가득찼던 청년들을 울렸다.
이날 부인과 함께 온 정명호씨(39)는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노래다. 김광석이 죽기 한 해 전에 이곳 학전 공연에 왔었다. 그 울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대학교 때 통기타 동아리에서 김광석을 알게 됐다는 나채현씨(27)는 ‘보조석’이라고 쓰인 티켓을 보여주며 좋아했다. “대학교 때 친구들끼리 김광석 아저씨 추모공연을 했어요. 이곳에 너무 오고 싶었는데 추첨에 떨어져서 오늘 새벽 6시부터 와서 죽치고 기다려 겨우 보조석을 얻었습니다.”
공연은 괜한 엄숙주의에 빠지지 않았지만, 굳어졌던 가슴을 데우기에 충분했다. 오후 4시에 시작된 공연은 예정된 시간인 6시를 지나, 7시반까지 이어졌다. 윈디시티는 “김광석씨가 캐리비안 지역에 살았다면 이런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만들어봤습니다”하며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레게버전으로 바꿔 불렀고, 드렁큰타이거는 ‘서른 즈음에’를 듣고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며 자신의 노래 ‘엄지 손가락’을 불렀다. 이적은 통기타를 들고 ‘정면승부’했다. 작곡자인 문대현이 직접 나와 ‘광야에서’를 부를 때 사람들은 목청을 높여 함께했고, 동물원이 무대에 올라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부를 때는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점점 더 커지는 듯했다. 그의 노래들은 여전히 가슴을 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리워지는 것은 다시 김광석이었다.
콘서트에 참석한 선후배 뮤지션들은 저마다 그에 대한 기억을 쏟아냈다. 성시경은 ‘이야기와 진심이 담긴 그의 노래’를 얘기했다. 김제동은 “사람이나 세월에 상처 받았을 때 나에게 빨간약 같은 노래였다”고 했다. 타이거JK에게는 ‘힙합만 진실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줬다. 92년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는 이적은 “그 모습이 노래하는 사람의 원형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진짜 노래’가 있다면 그것은 김광석의 노래일 것이라는 그리움이 120석의 작은 소극장 안에 멍울졌다.
문득 얼마 전 김광석 노래비와 관련한 기자회견장에서 학전 대표 김민기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광석이는 음악보다는 ‘노래’라 할 수 있어요. 초대권도 안 돌리고, 매체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1000회 공연할 수 있었던 건 노래의 힘이죠. 무대 위고 앞, 옆, 계단 사이사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그의 노래를 들으러 왔어요. 진정한 ‘대중가수’였지요. 대중음악이 사멸되는 지금 어떤 키워드로 다시 되돌아보고 매달릴 것인가 생각했을 때, 김광석의 ‘노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인 것이지요.”
마지막 무대는 ‘나의 노래’였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나의 노래는 나의 힘/나의 노래는 나의 삶….’ 그의 노래는 이제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삶이 되었다.
[문화일보 이로사 기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 노래는 멀리멀리 날아가리 [조선일보 한현우 기자]
歌客 김광석 노래비 세우고 추모공연한 '김광석의 사람들'
서른 두 해 짧은 기간, 가수 김광석이 지구에 머무르며 숱한 노래를 남긴 뒤에는 든든한 친구와 선후배들이 있었다.
지난 6일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입구에 김광석(1996년 사망) 노래비를 세우고, 이어 열린 추모공연 무대에서 김광석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 개런티 없이 출연했고, 음향과 조명, 무대장치도 모두 '김광석의 사람들'이 무료 제공했다.
추모행사를 기획한 김민기 학전 대표는 김광석추모사업회 회장이다. 김광석은 91년부터 5년간 학전을 비롯한 소극장들을 돌며 '1000회 공연' 기록을 세웠다. 95년 8월 '1000회 돌파 기념공연'도 학전에서 열었다.
그룹 동물원 멤버들은 86~87년 김광석이 고려대 앞에서 '고리'란 카페를 운영할 때부터 함께 지냈다. 당시 김광석은 노래패 '새벽' 멤버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 첫 공연을 준비하면서 동물원 데뷔작업을 했다.
김광석은 남이 쓴 곡을 받아서 탁월하게 해석하는 보컬리스트였다. 6일 무대에는 김목경·문대현·한동준·김형석 네 작곡가가 올랐다. 한국 블루스를 대표하는 기타리스트 김목경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작곡가다. 그의 1집에도 수록된 이 곡을 김광석은 94년 '다시부르기 2집'에서 리메이크했다.
영화·드라마음악을 만드는 문대현은 '광야에서'를 썼다. 성균관대 노래패 '소리사랑' 출신인 문대현은 83년쯤 노래패 모임에서 김광석을 처음 만났다. 문대현은 "'광야에서'는 84년부터 알려진 곡이었는데 김광석이 '다시부르기'를 녹음하면서 가져다 쓴 곡"이라고 했다. '너를 사랑해'의 싱어송라이터 한동준은 김광석 최초의 히트곡인 '사랑했지만'을 작곡했다. 김형석은 '사랑이라는 이유로'의 작곡가. 그는 이날 "광석이형과 첫 녹음할 때 피아노를 치며 실수를 하도 많이 해서 '너 집에 가라'는 소리를 들었었다"며 웃었다.
박학기와 장필순은 김광석의 동갑내기 친구. 두 사람은 63년생, 김광석은 64년 1월생이지만 친구로 어울렸다. 박학기는 "친해진 뒤 알고 보니 대구 살던 초등학생 때 같은 동네 살았었다"고 말했다.
윤도현과 유리상자는 김광석 공연에 게스트로 단골 출연하던 뮤지션. 윤도현은 게스트 시절 '타잔'을 주로 불렀다. 윤도현은 이날 "광석이형 공연대기실엔 늘 닭튀김이 있어서, 지금도 광석이형 생각을 하면 닭튀김 냄새가 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유리상자의 박승화 역시 김광석 공연 게스트로 솔로 데뷔했다.
노영심과 이소라는 김광석을 가까이 따르던 후배들. 이소라는 이날 첫 출연자로 나와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 노영심은 감기몸살로 불참.
이날 김광석과 직접 친분이 없는 후배들이 여럿 무대에 올랐다. 이적은 "대학 1학년이던 92년 바로 이 학전소극장에서 김광석 공연을 봤다"며 '기다려줘'를 불렀다. 드렁큰타이거의 타이거JK는 "'서른 즈음에'에서 영감을 얻은 제 곡이 '엄지손가락'"이라고 했다. MC 김제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김광석 팬. 김제동은 "'김광석 노래를 컬러링으로 쓰는 사람들 대표'로 왔다고 생각해 달라"고 말해 관객들을 웃겼다.
이날 오후 4시쯤 시작한 공연은 7시20분이 돼서야 끝났다. 추첨을 통해 판매한 140석은 경쟁률 15대 1을 넘었고, 나머지 자리엔 '김광석의 사람들'이 앉았다. 동물원 옛 멤버 김창기가 소주와 오징어를 들고 와, 공연 중반부터 출연자 대기실과 무대가 동시에 들썩거렸다. 대부분 출연자들이 뒤풀이에서 날짜를 넘기며 잔을 기울였다. 이 자리에서 70년대 포크듀오 '4월과 5월'의 백순진이 "비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로 시작하는 '등불'을 부르자, 모두들 화음을 넣어 따라불렀다. 그 합창 속에서 얼핏, 김광석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김광석 1964년 1월 22일 대구에서 태어난 김광석은 82년 명지대에 입학한 뒤, 신촌 카페 등지에서 노래를 부르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84년 '노찾사' 1집에 참여하면서 노래운동에 몸담았고, 88년 동물원으로 데뷔하면서 포크음악으로 전환했다. 89년 솔로데뷔 후 95년까지 음반 6장을 내고 공연 1000회를 넘기며 '가객(歌客)'으로 불렸다. 96년 1월 6일 새벽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돌연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그의 사인(死因)을 자살로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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