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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떠나보내며 [1편]
뭐라카노
2013. 5. 15. 22:19
(베스트 일레븐)
인저리 타임에서 언제고 한 번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던 인물이다. 파리 목숨보다 위태하다는 축구 감독직을 40년 가까이 했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체스터 Utd.)에서는 27년 동안 흔들림 없이 정상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때가 되면 그에 대한 일대기를 소개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때가 됐지 싶다. 우리 시간으로 지난 8일 그가 현역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고령이었기에 언제고 물러날 줄 알았으나 너무 갑작스러웠고, 하여 대단히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마에스트로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Utd. 감독 얘기다.
퍼거슨 감독이 은퇴를 선언한 후 국내외 수많은 축구 전문가와 언론, 그리고 팬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생산하고 있다. 퍼거슨 감독이 맨체스터 Utd.에서 머문 27년 동안의 공을 얘기했고, 그를 거쳐 간 스타들에 관한 얘기가 영웅담처럼 넘쳤다. 뿐만 아니다. 냉정한 시각에서 그를 바라보고자 하는 글도 있었으며, 보비 찰튼이나 데이비드 길 같은 주변인에 대한 얘기도 제법 많이 나왔다. 이렇게 퍼거슨 감독과 관련한 글이 홍수처럼 넘쳐 조금 망설였다. 자칫 홍수에 휩쓸려 제대로 된 이야기를 전할 수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가치가 희석될 수도 있어 그간 꼭 한 번은 하고 싶었던 그에 대한 얘기를 하기로 했다. 반세기 넘게 축구인으로 살아온 퍼거슨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맨체스터 Utd.에 머물렀던 시절에 관한 얘기만 담지 않았다. 그 이전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던 시절도 좇았고, 그보다 더 앞선 소년 퍼거슨과 청년 퍼거슨에 대한 얘기도 넣었다. 반세기 넘는 그의 축구 인생을 천천히 되밟다보면, 2013년 현재 그의 퇴장이 왜 아쉽고 위대하게 느껴지는 지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축구인 퍼거슨 감독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 시대가 조아리고 역사가 기억할 마에스트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떠나보내며 [1편]
드리블을 잘 했던 소년
퍼거슨은 1941년 12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있는 고반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가정은 특별히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평범한 곳이었다. 퍼거슨의 할아버지는 배와 보트를 만드는 일을 했고,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서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서 살아갔다. 무난한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란 그는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 16살 무렵이었다.
글래스고 힐링턴 산업 지구에 위치한 위크맨이란 회사가 있다. 위크맨은 탄소필터가 달린 공업 기구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회사였다. 그는 이곳에 다녔다. 가끔 지나친 고집과 기행으로 말썽을 피우기도 했고 정식 사원이 아닌 견습 사원이었지만 그는 회사 간부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머리가 영특해 주어지는 일을 곧잘 해냈기 때문이다. 특히 깊은 생각이 필요한 일에 골몰해 해법을 찾아낼 때는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간부들의 칭찬 세례가 쏟아지는 회사보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 다니는 축구장이 좋았다. 당시 퍼거슨은 공장 견습생인 동시에 아마추어 축구 선수이기도 했는데, 그가 살던 곳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퀸즈 파크에 속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또래를 능가하는 훌륭한 드리블 실력을 과시했는데, 12살 때부터 갈고닦은 축구 실력으로 친구들에게 큰 부러움을 사던 소년이었다.
그의 축구 실력이 좋았다는 것은 퀸즈 파크 유소년 팀에 입단하던 해, 청소년과 성인 모두가 뛸 수 있는 3군 성격의 햄프든 Ⅺ에 이어 2군 스톨러스로 빠르게 월반을 거듭했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머지않아 퀸즈 파크 1군에까지 이름을 올리게 됐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그 3년 동안 퍼거슨은 31경기의 공식전에 출전해 15골을 넣으며, '신동' 소리까지 들었다. 물론 작은 마을에서였지만 말이다.
퀸즈 파크를 이끌어 가는 주축 선수로 성장한 퍼거슨의 명성은 멀리 크게 떨쳐지진 않았으나, 이웃 지역까지 소문날 정도는 됐다. 고든에서 조금 떨어진 퍼스라는 지역의 축구 팀 세인트 존스턴이 그를 주목했다. 세인트 존스턴은 당시 스코틀랜드 프로축구 1부리그에 속한 팀이었다. 퀸즈 파크와는 레벨부터가 다른 진짜 프로 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좀 더 나은 축구를 하고 싶어 하던 그는 세인트 존스턴의 제안을 어렵지 않게 수락했다.
세인트 존스턴 스카우트 담당자가 그의 부모를 설득해 축구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나 성급한 결정이었다. 아무리 아마추어 팀에서 날고 기어도 프로는 엄연히 다른 레벨이었다. 그는 프로들과 발맞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는 빠르게 감독 눈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4년 동안 세인트 존스턴에서 그가 출장한 경기 수는 고작 37경기 밖에 안 됐다.
유능한 골잡이를 멈추게 한 '종교'
백업 멤버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던 1964년, 퍼거슨은 어느덧 스무 살을 넘긴 건장한 청년이 돼 있었다. 이제 정말 축구 선수로서 본격 성장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세인트 존스턴에서 그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 왔다. 던펌린이란 팀에서 이적 제안이 온 것이다. 당시 던펌린을 이끌던 스타인 감독이 퍼거슨의 잠재성을 높게 평가한 때문이었다. 4년 만에 찾아온 실로 귀한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는 그의 손에 쉽게 잡히지 않았다. 이적을 준비하던 때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민 스타인 감독이 던펌린을 떠난 것이다. 그는 졸지에 길을 잃은 미아가 될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스타인 감독의 후임으로 팀 지휘봉을 잡은 커닝햄 감독이 그를 마음에 들어해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신세는 면했다. 지난 4년간의 정체와 이적 과정에서 받은 상처는 그는 더 단단한 각오로 던펌린에 둥지를 틀었다.
던펌린으로 이적한 그는 이전보다 한결 좋아진 모습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드리블 실력이 빛을 발했고, 감독의 믿음 아래 많은 경기에 출전하면서 경기를 보는 시야도 훌륭하게 자랐다. 그는 던펌린에서 총 세 시즌을 머물렀는데, 89경기에 출전해 무려 66골을 넣으며 팀 간판 선수로 성장했다. 세인트 존스턴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비상이었다. 당연히 퍼거슨이란 이름은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퍼졌다.
그의 활약에 스코틀랜드 내 주요 클럽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던펌린 시절 페어스컵(현재의 UEFA 유로파리그)에 참가해 슈투트가르트(독일)나 아틀레틱 빌바오(스페인) 같은 다른 국가와의 클럽 대항전에서 눈에 띠는 실력을 보였다. 이는 스코틀랜드 최고 명문 중 하나인 레인저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린 시절부터 레인저스의 열혈 팬이었던 그에겐 꿈이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67년 레인저스의 일원이 된 그는 입단 첫해부터 23골을 넣으며 팀 내 득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정말 드라마와 같은 놀라운 일이었다. 고든이란 작은 지역에서 아마추어 축구 선수로 시작한 그에게는 이제 창창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바로 종교 문제다. 퍼거슨은 레인저스로 옮기기 직전인 1966년 결혼했는데, 아내가 가톨릭 집안의 딸이었던 것이다.
글래스고를 연고로 하는 레인저스는 개신교를 믿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창단한 팀이다. 그런데 글래스고에는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일랜드에서 삶의 터전을 옮긴 이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훗날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할 셀틱이란 팀을 만들었는데, 당연히 레인저스를 지지하던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탄생한 게 그 유명한 '올드 펌 더비'다. 그런데 레인저스 최고 스타의 아내가 가톨릭을 믿었으니 퍼거슨은 이후 극심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술집 사장에서 생애 첫 감독으로
입단 첫 해 23골을 넣었던 퍼거슨은 아내가 가톨릭 집안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부터 따가운 편견과 싸워야 했다. 뿐만 아니다. 레인저스 감독이 그를 특별한 이유 없이 경기에서 빼기 시작했다. 감독은 실력 좋은 그를 쓰고 싶었으나, 레인저스 팬들의 성화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의 출장 기회는 급격히 줄었다. 당연히 실력도 자라지 않았다. 한창 뛰어야 할 나이에 벤치에 머무르면서 자신감마저 잃어버렸다.
그가 받은 상처는 컸다. 축구를 잘하는 것 외, 종교가 선수를 차별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스코틀랜드 최고의 명문 레인저스와 작별하는 것을 선택했다. 레인저스를 떠난 그는 1969년 폴커크에 입단했다. 그러나 레인저스에서 허비한 시간이 워낙 길었기에 예전 기량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해 고질적이던 무릎 부상도 그를 괴롭히면서 1973년 이적한 에어Utd.에서 1년 더 현역으로 뛴 후 은퇴하고 말았다.
상처와 부상으로 말미암아 은퇴를 선언하긴 했지만 생계를 꾸릴 일이 막막했다. 아직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인데다,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모아 놓은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가장이란 책임감도 그의 목을 죄여왔다. 그렇다고 마땅한 코치직을 제안하는 곳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마나 있던 재산을 털어 술집을 차렸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번스 코티지'란 이름의 술집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털어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신통치 않았다. 사업은 고사하고 음식점을 경영한 적도 없는 그에게 사장이란 직책은 어렵기만 했다. 레인저스에 머물던 시절만큼이나 깜깜한 미래였다. 가계 이름을 '퍼기스'로 바꾸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눈에 띄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래도 좀 유명했던 자신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뒤에는 돈벌이가 좀 됐지만, 생계를 넉넉하게 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축구 감독을 해보지 않겠느냐"라는 제의가 들어 왔다.
1974년 7월이었다. 이스트 스털링샤이어가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했다. 코치도 아닌 감독이란 제안에 깜짝 놀랐다. 지도자 경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장 이스트 스털링샤이어로 향했다. 재정적으로 취약했고 선수라곤 단 여덟 명 뿐이었으나 그에게는 새로운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던 축구장에 다시 발을 내디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는 가진 모든 열정을 쏟았다. 바닥까지 추락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자라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머잖아 결실이 맺히기 시작했다. 2부리그에서 하위권에 머무르던 팀을 한때 3위까지 올려놓았다. 더불어 적은 돈으로 쓸 만한 선수를 발굴하는 것에도 재능을 보이며 팀에 큰 보탬이 됐다. 그즈음 "퍼거슨이 감독으로 돌아왔다"라는 소문이 스코틀랜드에 퍼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도 이스트 스털링샤이어에서 행복했다. 무엇보다 그토록 사랑하는 축구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했다. 비록 높은 보수도 아니었고, 팀과 퍼기스란 술집을 동시에 운영해야 해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는 축구장에서 축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렇게 이스트 스털링샤이어에서 축구 감독으로 살아가던 퍼거슨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1974년 10월의 일이다.
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당시 세인트 미렌을 이끌던 커닝햄 감독이었다. 커닝햄 감독은 퍼거슨이 선수 시절이던 1964년, 그가 세인트 존스턴에서 던펌린으로 이적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이었다. 만약 커닝햄 감독이 당시 퍼거슨을 거두지 않았더라면 그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퀸즈 파크에 머물며 그런저런 축구 선수로 생을 마감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어떤 면에서 커닝햄 감독은 그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커닝햄 감독이 그에게 전화한 이유는 세인트 미렌의 후임 감독을 맡으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였다. 커닝햄 감독은 그에게 자신이 곧 세인트 미렌 감독직을 내려놓을 것이라며 후임이 되어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퍼거슨으로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세인트 미렌은 맡고 있던 이스트 스털링샤이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클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이스트 스털링샤이어와의 의리다.
비록 이스트 스털링샤이어가 열악한 환경의 팀이었지만 자신에게 처음으로 감독이란 직함을 선물해준 곳이다. 그래서 그는 커닝햄 감독의 완고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고사 뜻을 밝혔다.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커닝햄 감독은 마지막 순간까지 퍼거슨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그의 마음은 비석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커닝햄 감독은 그를 후임으로 세우지 못한 채 세인트 미렌을 떠나고 말았다.
커닝햄 감독이 떠난 후에도 세인트 미렌은 새로운 감독을 구하지 못했다. 커닝햄 감독이 끝까지 퍼거슨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커닝햄 감독의 한결같음에 결국 그가 항복했다. 세인트 미렌을 맡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가 적을 옮긴 이유는 커닝햄 감독의 적극적 구애가 가장 컸으나 그 외에도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었다. 특히 그때까지 문을 닫지 않았던 술집 퍼기스에서 일어나는 피곤한 사건들과 감독으로서 거두고 싶었던 좀 더 큰 성공에 대한 야망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최대한 정중하게 이스트 스털링샤이어를 떠났다. 자신에게 감독이란 직함을 달아준 곳에 대한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한 것이다. 이후 세인트 미렌 지휘봉을 잡은 그는 그때부터 숨어 있던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74-1975시즌부터 팀을 리빌딩한 퍼거슨은 불과 세 번째 시즌 만인 1976-1977시즌 1부리그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의 감독 커리어 사상 첫 번째 우승이었으며, 훗날 위대한 감독 퍼거슨으로 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 2편에서 계속….
인저리 타임에서 언제고 한 번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던 인물이다. 파리 목숨보다 위태하다는 축구 감독직을 40년 가까이 했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체스터 Utd.)에서는 27년 동안 흔들림 없이 정상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때가 되면 그에 대한 일대기를 소개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때가 됐지 싶다. 우리 시간으로 지난 8일 그가 현역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고령이었기에 언제고 물러날 줄 알았으나 너무 갑작스러웠고, 하여 대단히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마에스트로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Utd. 감독 얘기다.
퍼거슨 감독이 은퇴를 선언한 후 국내외 수많은 축구 전문가와 언론, 그리고 팬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생산하고 있다. 퍼거슨 감독이 맨체스터 Utd.에서 머문 27년 동안의 공을 얘기했고, 그를 거쳐 간 스타들에 관한 얘기가 영웅담처럼 넘쳤다. 뿐만 아니다. 냉정한 시각에서 그를 바라보고자 하는 글도 있었으며, 보비 찰튼이나 데이비드 길 같은 주변인에 대한 얘기도 제법 많이 나왔다. 이렇게 퍼거슨 감독과 관련한 글이 홍수처럼 넘쳐 조금 망설였다. 자칫 홍수에 휩쓸려 제대로 된 이야기를 전할 수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가치가 희석될 수도 있어 그간 꼭 한 번은 하고 싶었던 그에 대한 얘기를 하기로 했다. 반세기 넘게 축구인으로 살아온 퍼거슨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맨체스터 Utd.에 머물렀던 시절에 관한 얘기만 담지 않았다. 그 이전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던 시절도 좇았고, 그보다 더 앞선 소년 퍼거슨과 청년 퍼거슨에 대한 얘기도 넣었다. 반세기 넘는 그의 축구 인생을 천천히 되밟다보면, 2013년 현재 그의 퇴장이 왜 아쉽고 위대하게 느껴지는 지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축구인 퍼거슨 감독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 시대가 조아리고 역사가 기억할 마에스트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떠나보내며 [1편]
퍼거슨은 1941년 12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있는 고반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가정은 특별히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평범한 곳이었다. 퍼거슨의 할아버지는 배와 보트를 만드는 일을 했고,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서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서 살아갔다. 무난한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란 그는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 16살 무렵이었다.
글래스고 힐링턴 산업 지구에 위치한 위크맨이란 회사가 있다. 위크맨은 탄소필터가 달린 공업 기구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회사였다. 그는 이곳에 다녔다. 가끔 지나친 고집과 기행으로 말썽을 피우기도 했고 정식 사원이 아닌 견습 사원이었지만 그는 회사 간부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머리가 영특해 주어지는 일을 곧잘 해냈기 때문이다. 특히 깊은 생각이 필요한 일에 골몰해 해법을 찾아낼 때는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간부들의 칭찬 세례가 쏟아지는 회사보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 다니는 축구장이 좋았다. 당시 퍼거슨은 공장 견습생인 동시에 아마추어 축구 선수이기도 했는데, 그가 살던 곳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퀸즈 파크에 속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또래를 능가하는 훌륭한 드리블 실력을 과시했는데, 12살 때부터 갈고닦은 축구 실력으로 친구들에게 큰 부러움을 사던 소년이었다.
그의 축구 실력이 좋았다는 것은 퀸즈 파크 유소년 팀에 입단하던 해, 청소년과 성인 모두가 뛸 수 있는 3군 성격의 햄프든 Ⅺ에 이어 2군 스톨러스로 빠르게 월반을 거듭했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머지않아 퀸즈 파크 1군에까지 이름을 올리게 됐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그 3년 동안 퍼거슨은 31경기의 공식전에 출전해 15골을 넣으며, '신동' 소리까지 들었다. 물론 작은 마을에서였지만 말이다.
퀸즈 파크를 이끌어 가는 주축 선수로 성장한 퍼거슨의 명성은 멀리 크게 떨쳐지진 않았으나, 이웃 지역까지 소문날 정도는 됐다. 고든에서 조금 떨어진 퍼스라는 지역의 축구 팀 세인트 존스턴이 그를 주목했다. 세인트 존스턴은 당시 스코틀랜드 프로축구 1부리그에 속한 팀이었다. 퀸즈 파크와는 레벨부터가 다른 진짜 프로 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좀 더 나은 축구를 하고 싶어 하던 그는 세인트 존스턴의 제안을 어렵지 않게 수락했다.
세인트 존스턴 스카우트 담당자가 그의 부모를 설득해 축구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나 성급한 결정이었다. 아무리 아마추어 팀에서 날고 기어도 프로는 엄연히 다른 레벨이었다. 그는 프로들과 발맞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는 빠르게 감독 눈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4년 동안 세인트 존스턴에서 그가 출장한 경기 수는 고작 37경기 밖에 안 됐다.
백업 멤버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던 1964년, 퍼거슨은 어느덧 스무 살을 넘긴 건장한 청년이 돼 있었다. 이제 정말 축구 선수로서 본격 성장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세인트 존스턴에서 그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 왔다. 던펌린이란 팀에서 이적 제안이 온 것이다. 당시 던펌린을 이끌던 스타인 감독이 퍼거슨의 잠재성을 높게 평가한 때문이었다. 4년 만에 찾아온 실로 귀한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는 그의 손에 쉽게 잡히지 않았다. 이적을 준비하던 때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민 스타인 감독이 던펌린을 떠난 것이다. 그는 졸지에 길을 잃은 미아가 될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스타인 감독의 후임으로 팀 지휘봉을 잡은 커닝햄 감독이 그를 마음에 들어해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신세는 면했다. 지난 4년간의 정체와 이적 과정에서 받은 상처는 그는 더 단단한 각오로 던펌린에 둥지를 틀었다.
던펌린으로 이적한 그는 이전보다 한결 좋아진 모습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드리블 실력이 빛을 발했고, 감독의 믿음 아래 많은 경기에 출전하면서 경기를 보는 시야도 훌륭하게 자랐다. 그는 던펌린에서 총 세 시즌을 머물렀는데, 89경기에 출전해 무려 66골을 넣으며 팀 간판 선수로 성장했다. 세인트 존스턴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비상이었다. 당연히 퍼거슨이란 이름은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퍼졌다.
그의 활약에 스코틀랜드 내 주요 클럽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던펌린 시절 페어스컵(현재의 UEFA 유로파리그)에 참가해 슈투트가르트(독일)나 아틀레틱 빌바오(스페인) 같은 다른 국가와의 클럽 대항전에서 눈에 띠는 실력을 보였다. 이는 스코틀랜드 최고 명문 중 하나인 레인저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린 시절부터 레인저스의 열혈 팬이었던 그에겐 꿈이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67년 레인저스의 일원이 된 그는 입단 첫해부터 23골을 넣으며 팀 내 득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정말 드라마와 같은 놀라운 일이었다. 고든이란 작은 지역에서 아마추어 축구 선수로 시작한 그에게는 이제 창창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바로 종교 문제다. 퍼거슨은 레인저스로 옮기기 직전인 1966년 결혼했는데, 아내가 가톨릭 집안의 딸이었던 것이다.
글래스고를 연고로 하는 레인저스는 개신교를 믿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창단한 팀이다. 그런데 글래스고에는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일랜드에서 삶의 터전을 옮긴 이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훗날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할 셀틱이란 팀을 만들었는데, 당연히 레인저스를 지지하던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탄생한 게 그 유명한 '올드 펌 더비'다. 그런데 레인저스 최고 스타의 아내가 가톨릭을 믿었으니 퍼거슨은 이후 극심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입단 첫 해 23골을 넣었던 퍼거슨은 아내가 가톨릭 집안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부터 따가운 편견과 싸워야 했다. 뿐만 아니다. 레인저스 감독이 그를 특별한 이유 없이 경기에서 빼기 시작했다. 감독은 실력 좋은 그를 쓰고 싶었으나, 레인저스 팬들의 성화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의 출장 기회는 급격히 줄었다. 당연히 실력도 자라지 않았다. 한창 뛰어야 할 나이에 벤치에 머무르면서 자신감마저 잃어버렸다.
그가 받은 상처는 컸다. 축구를 잘하는 것 외, 종교가 선수를 차별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스코틀랜드 최고의 명문 레인저스와 작별하는 것을 선택했다. 레인저스를 떠난 그는 1969년 폴커크에 입단했다. 그러나 레인저스에서 허비한 시간이 워낙 길었기에 예전 기량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해 고질적이던 무릎 부상도 그를 괴롭히면서 1973년 이적한 에어Utd.에서 1년 더 현역으로 뛴 후 은퇴하고 말았다.
상처와 부상으로 말미암아 은퇴를 선언하긴 했지만 생계를 꾸릴 일이 막막했다. 아직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인데다,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모아 놓은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가장이란 책임감도 그의 목을 죄여왔다. 그렇다고 마땅한 코치직을 제안하는 곳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마나 있던 재산을 털어 술집을 차렸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번스 코티지'란 이름의 술집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털어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신통치 않았다. 사업은 고사하고 음식점을 경영한 적도 없는 그에게 사장이란 직책은 어렵기만 했다. 레인저스에 머물던 시절만큼이나 깜깜한 미래였다. 가계 이름을 '퍼기스'로 바꾸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눈에 띄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래도 좀 유명했던 자신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뒤에는 돈벌이가 좀 됐지만, 생계를 넉넉하게 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축구 감독을 해보지 않겠느냐"라는 제의가 들어 왔다.
1974년 7월이었다. 이스트 스털링샤이어가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했다. 코치도 아닌 감독이란 제안에 깜짝 놀랐다. 지도자 경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장 이스트 스털링샤이어로 향했다. 재정적으로 취약했고 선수라곤 단 여덟 명 뿐이었으나 그에게는 새로운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던 축구장에 다시 발을 내디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는 가진 모든 열정을 쏟았다. 바닥까지 추락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자라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머잖아 결실이 맺히기 시작했다. 2부리그에서 하위권에 머무르던 팀을 한때 3위까지 올려놓았다. 더불어 적은 돈으로 쓸 만한 선수를 발굴하는 것에도 재능을 보이며 팀에 큰 보탬이 됐다. 그즈음 "퍼거슨이 감독으로 돌아왔다"라는 소문이 스코틀랜드에 퍼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도 이스트 스털링샤이어에서 행복했다. 무엇보다 그토록 사랑하는 축구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했다. 비록 높은 보수도 아니었고, 팀과 퍼기스란 술집을 동시에 운영해야 해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는 축구장에서 축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렇게 이스트 스털링샤이어에서 축구 감독으로 살아가던 퍼거슨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1974년 10월의 일이다.
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당시 세인트 미렌을 이끌던 커닝햄 감독이었다. 커닝햄 감독은 퍼거슨이 선수 시절이던 1964년, 그가 세인트 존스턴에서 던펌린으로 이적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이었다. 만약 커닝햄 감독이 당시 퍼거슨을 거두지 않았더라면 그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퀸즈 파크에 머물며 그런저런 축구 선수로 생을 마감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어떤 면에서 커닝햄 감독은 그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커닝햄 감독이 그에게 전화한 이유는 세인트 미렌의 후임 감독을 맡으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였다. 커닝햄 감독은 그에게 자신이 곧 세인트 미렌 감독직을 내려놓을 것이라며 후임이 되어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퍼거슨으로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세인트 미렌은 맡고 있던 이스트 스털링샤이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클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이스트 스털링샤이어와의 의리다.
비록 이스트 스털링샤이어가 열악한 환경의 팀이었지만 자신에게 처음으로 감독이란 직함을 선물해준 곳이다. 그래서 그는 커닝햄 감독의 완고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고사 뜻을 밝혔다.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커닝햄 감독은 마지막 순간까지 퍼거슨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그의 마음은 비석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커닝햄 감독은 그를 후임으로 세우지 못한 채 세인트 미렌을 떠나고 말았다.
커닝햄 감독이 떠난 후에도 세인트 미렌은 새로운 감독을 구하지 못했다. 커닝햄 감독이 끝까지 퍼거슨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커닝햄 감독의 한결같음에 결국 그가 항복했다. 세인트 미렌을 맡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가 적을 옮긴 이유는 커닝햄 감독의 적극적 구애가 가장 컸으나 그 외에도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었다. 특히 그때까지 문을 닫지 않았던 술집 퍼기스에서 일어나는 피곤한 사건들과 감독으로서 거두고 싶었던 좀 더 큰 성공에 대한 야망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최대한 정중하게 이스트 스털링샤이어를 떠났다. 자신에게 감독이란 직함을 달아준 곳에 대한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한 것이다. 이후 세인트 미렌 지휘봉을 잡은 그는 그때부터 숨어 있던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74-1975시즌부터 팀을 리빌딩한 퍼거슨은 불과 세 번째 시즌 만인 1976-1977시즌 1부리그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의 감독 커리어 사상 첫 번째 우승이었으며, 훗날 위대한 감독 퍼거슨으로 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 2편에서 계속….